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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모토 기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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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2. 생애 및 정치 활동[편집]
나라현 요시노군 오요도정에서 태어나 오사카부 타카츠키시에서 자랐다. 나고야대학 교육학부 부속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년간 백화점 점원으로 근무하다가 와세다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83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발생하자 아시아 국가들과 일본 간의 교류 활성화를 위한 목적으로 NGO 단체인 ‘피스 보트(Peace Boat)’를 설립한다. 이 단체는 아시아를 비롯한 각지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겠다는 목적으로 장기간의 선박 여행을 기획하는 단체다. 이후에도 유엔 지구 써밋 NGO의 대표를 맡는 등 시민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1996년, 사회민주당 당수인 도이 다카코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받아 정계에 입문해 41회 중원선에서 긴키 블럭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사회민주당에서 간사장 대리, 홍보위원장 등의 당직들을 맡았다. 2000년 42회 중원선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타카츠키시가 속한 오사카 10구에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댔다.
그러나 2002년에 비서관 급여 횡령 논란이 터지면서 쓰지모토는 책임지고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수사를 통해 논란의 내용들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2003년 7월에 구속되었고, 쓰지모토는 사건 직후 증거 인멸을 시도한 것을 인정했다. 2004년 2월, 도쿄지방법원은 비서관 급여 1840만엔을 가로채고 이를 숨긴 것에 대해 사기 혐의를 적용하여 쓰지모토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쓰지모토는 집행유예 기간 중 치러진 제2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오사카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당연히 낙선했다.
낙선 후 다시 사회민주당으로 복당해 2005년 44회 중원선에서 원래 지역구였던 오사카 10구에 출마해 비례부활로 당선되었으며 2009년 45회 중원선에서 민주당 추천을 받아 당선됐다.
당선 후 사회민주당의 국회대책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민주당, 사회민주당, 국민신당의 연립 정권 탄생에 일조하였으며, 쓰지모토 본인은 마부치 스미오와 같이 국토교통성 부대신에 취임했다.[1]
2010년 2월 4일, 국토교통의 공공사업 예산 배분에 관한 정보를 민주당 지방 조직에 유출시킨 마부치 스미오의 경질을 요구한 자유민주당에 대해 과민 반응한다며 기각했다.
그러다가 2010년 5월,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에 대해 당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이었던 후쿠시마 미즈호 당수가 미국과의 합의를 반대하자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후쿠시마를 대신직에서 파면하여 사회민주당의 연정 이탈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쓰지모토는 당의 연정 이탈에 반대했으나 당은 결국 연정 이탈을 결정하고, 쓰지모토는 이에 항의하면서 국토교통부대신직을 사퇴하고 사회민주당을 탈당했다. 탈당 후 도호쿠 대지진이 발생하자 간 제2차 개조내각에서 재해프론티어 담당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역임하다가 2011년 노다 내각이 출범하면서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46회 중원선에서 오사카 10구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비례부활로 당선됐다. 이후 47회 중원선, 48회 중원선에서 연속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49회 중원선에서 일본 유신회의 정치신인인 이케시타 다쿠에게 완패하여 비례부활을 못하고 낙선하였다.연합뉴스, 뉴시스
이후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거 참패에 대해 술회하면서 향후 야당 공투 기조를 유지하더라도, 공산당과의 연대에만 생각이 갇혀 자민당에 의해 역선전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는 감상을 밝혔다. 2021년 입헌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같은 여성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생각으로 니시무라 지나미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2022년 7월 10일 열린 26회 참원선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되었고, 당 내 후보 중에서 가장 먼저 당선되었다. 참의원으로서는 첫 국회 입성. 개인 표에서 무려 428,859표를 쓸어가며 입민당의 비례대표 득표수를 견인했다. 2위로 당선된 오니키 마코토 후보와 득표수 차는 25만표에 달하며 민주당계 정당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역대 비례대표 득표수 2위의 기록이다.[2] 단순 계산으로도 입헌민주당이 얻은 비례표의 약 6.3%를 개인 한명이 받은 것이다. 게다가 참원선의 참패로 인해 당권을 잡고 있던 신정권연구회 등 보수-중도파의 입지가 약해진 만큼, 당내 진보파에 속하는 쓰지모토의 입지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참원선 이후 방송에서 당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당이 쇄신의 방향으로 향할 것이라 밝히며 당의 쇄신이 필요하다고 발언했고 사이토 렌호 의원도 이에 동의했다.# #
이후에는 참의원으로 재직하면서 입헌민주당의 주요 창립 멤버 중 하나로 대우받고 있다. 2023년 일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경합 선거구에 에다노 유키오 전 대표 등 초대 지도부와 함께 유세를 다니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3. 정치 성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선거 이력[편집]
6. 여담[편집]
- 여러모로 유언비어로 인한 피해를 많이 받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면 관련 정보 중 90%가 루머였을 정도라고 한다. 2015년 경에는 자민당 소속 참의원인 마루카와 다마요가 쓰지모토를 가리켜 “피스 보트를 탄 쓰지모토가 해적이 있는 해역에서 자위대에게 보호를 받았다”라고 말했고 이에 아베 신조가 “해적대책법안에 민주당은 반대한다는 것을 도와주는 의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에 쓰지모토는 사과를 요구했고 자민당은 서면으로, 마루카와 다마요는 직접 쓰지모토에게 해당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그 와중에 아베만 사과 안했다.
- 아베 신조와 전면으로 대립한 적이 있는데, 2020년 2월 12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집중심의 중 쓰지모토 간사장 대행이 벚꽃 스캔들에 대하여 "썩은 생선머리"에 빗대며 강력하게 추궁하자 당시 각료석에 앉아 질의를 지켜 보고 있던 아베 총리가 "의미 없는 질문이야."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이 쓰지모토에게 딱 걸린 것. 아베는 처음에 부정하다가 17일, 해당 발언에 대해 공식 사과하면서 논란이 마무리됐다.
- 평화헌법 개정을 매우 반대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인데, 2000년에는 일본에 헌법 9조와 비핵 3원칙 수호 등을 요구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해 평화헌법 수호를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집단적 자위권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다마키 유이치로, 이즈미 겐타와 함께 플래카드를 들고 반대를 했다.
- 산케이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2015년 9월 16일 평화안전법제의 국회 심의에서 사회민주당의 후쿠시마 미즈호, 민주당의 고미야마 야스코 등과 함께 이사회실 문 앞을 막았으며, 남성 의원들이 언급할 때마다 "성희롱이다!"라고 추태를 보이며 질의 개시를 방해했었다. 이때 이시이 히로오 의원이 성희롱을 했다고 하자 이시이 의원이 격양한 적도 있었다.#
- 쓰지모토는 자유민주당의 가토 고이치와 신당 사키가케의 도모토 아키코와 함께 NPO(특정 비영리 활동 촉진법) 성립에 노력했다.
- 극우로 유명한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유세를 같이 해주었다. 쓰지모토가 극우파인 것은 아니고, 반미우익 성향의 고바야시가 자민당과 아베 정권의 친미 노선을 비판하며 입헌민주당 지지선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 원래 민주당계의 텃밭이였던 긴키의 야당지지율을 유신회가 대량으로 흡수해서 그런지 입헌민주당 48회 중의원 의원들 중 11구의 히라노 히로후미 전 관방장관과 함께 유일한 오사카의 민주당계 의원이였고 표를 지키기 위해 유신회와 경쟁하면서 유신회 소속 하시모토 도루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그런데 49회 중원선에서 낙선한 후 하시모토의 방송에 출연해 낙선 소감을 묻는 와중에 하시모토에게 러브콜을 보낸것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 2015년 2월 20일. 일본에서 테러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아베 신조에게 몸을 사릴 것을 충고했지만 아베 신조는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라며 코웃음 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아베 신조가 진짜로 암살당하면서 일본 내에서 아이러니의 극치로 회자되고 있다.###
- 26회 참원선 유세기간 당시 코이즈미 쿄코의 공개지지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